사회복지 공무원일기 - 관용과 공존의 삶을 살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회가 떠뜰썩해지기 시작한다. 하긴 다이나믹 코리아가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코로나 창궐하여 해방 이후 가장 어수선한 시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와중에도 각 당과 장외에서 역대 최대의 출마선언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 정치가 많이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정치판에 대한 날선 국민들의 감정적 대응에 우려도 깊다. 몇 가지 현상들에 대해 의견을 내보고자 한다.
역대 최대 출마선언. 우리 사회의 민주화 증거
불과 30년 전 만해도 집권 여당의 2인자 소리만 꺼내도 정적으로 제거되던 시절이었다. 박정희 시절의 윤필용 수경사령관, 이후락 정보부장, 김종필과 전두환 시절 허삼수, 허화평 등 서슬퍼런 군사독재 시절엔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맷집 좋은 국민 스타들만이 목숨을 걸고 대선판에 명함을 낼 수 있었다. 역대 최대의 출마선언이 나온 것 만으로도 다양한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장이 꽃을 피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한 편으로 우려스러운 점은 70년 역사 동안 거의 양당제라 할 수 있는 우리 정치판이 아직도 중심을 못 잡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유당의 맥을 이어왔다 할 수 있는 국민의 힘은 간판만 갈아왔고, 민주당은 반독재 투쟁시절 군사독재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민주진영으로 국민과 원팀을 이루며 양당제의 한 축으로 자리잡나 했지만 지금은 양당제라 할 만큼 뚜렷한 정책 노선이 없다. 엄격히 말하면 그 놈이 그 놈인 셈이다. 그래서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라하는데 . 왜 최선을 선택할 수 없는건가? 정치인에게 채찍질 하지 않으며 적당한 선에서 차악에 만족해야 하는 이 현실은 우리가 자초한 일이다. 엘리트 관료가 사회를 이끌던 과거엔 국민의 교육수준, 정보력, 실행력이 낮아 관료와 정치인에게 기대고 그들에게 공과의 책임을 더 강하게 물을 수 있지만 언론, 집회, 결사, 출판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오늘 날 한국사회에세 차악을 선택하고 만족해야 한다면 민주주의 작동 기제의 핵심 요소인 국민들에게 책임이 더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국민 서로 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해해야
국민들의 정치를 바라보는 태도는 또 어떠한가? 포털 뉴스의 댓글을 살펴보면 물론 이를 다수의 여론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터넷 기사에 댓글 달기를 좋아하는 고관여 층의 의견이니까, 하지만 그 댓글에 심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도 다수가 있을 것이라 예상해본다면 정치에 무관여층을 제외한다면 상대 진영에 대해 너무나 감정적으로 대응을 하고 있다. 이는 한 사회가 걸어 온 축적된 사회 문화적 상황, 즉 역사를 바탕으로 이해하지 않기에 일어는 일이다. 한국 전쟁의 레드컴플렉스와 이를 통치 수단으로 사용한 독재정권으로 인해 자유로운 이념의 공존이 사라지다보니 차이에 대해 차별하지 않고 서로 다른 점으로 받아들이는 톨레랑스 즉 관용의 정신이 사라져버렸다. 관용이 없는 사회에서 어떻게 다양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
국민 통제의 독재정치는 일상생활 마저도 피아를 구분 해가며 불안에 떨며 살게했고 전후의 척박한 삶과 대기업 중심의 낙수정책은 민중이 적자생존의 늪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지금의 태극기 부대를 주축으로 하고 있는 전후 세대의 삶이 이러했다. 해방 후 친미를 통해 살아남은 매국 세력과 독재에 기생하며 부와 권력을 누리는 통치체제에서, 6.25 때 각종 초법적인 반인권적 사건들을 보면서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기형적 민주주의를 겪어 온 세대이다. 개인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보다 국가에 나의 정체성을 묻어버리고 함께 가는 것이 생존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삶과 함께 해왔던 당시의 국가, 또는 집단, 정치체제는 평생 개인의 정체성과 동일시 해 온 소중한 삶의 자산이다. 민주주의 국민으로서 누려야 하는 여러 소중한 삶들이 독재자에 의해 송두리째 날아가버렸지만 이제와서 그 체제를 부정한다면 개인의 삶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이기에 무의식적 집단 방어기제로 저렇게 태극기를 흔드는 것은 아닐까라고 추측해본다. 이와 관련해서는 영화 26년을 보면 계엄군으로 참가했다 발포 명령을 내린 통치자의 곁에서 평생을 경호하며 살아 온 한 군인의 얘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그가 부정되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이기에 자신은 그를 지켜야 한다고 소리친다.
세대간의 정치적 이견을 이해하는 일이 먼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한다면 70-80대의 집단화 된 정치 성향은 지금 세대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게 진리다. 앞서 긴 예를 든 6.25와 이승만, 박정희를 겪은 세대와 87년 6월 항쟁을 이끌어 낸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동시에 겪은 세대와 이 모두를 이뤄낸 뒤 고속 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인한 취업 전쟁에 내 몰리는 세대가 공존하고 있다. 각 세대는 열정을 쏟아낸 지나 간 시절이 삶의 전부이자 자신을 규정하는 정체성이다. 태극기 어르신들은 후배들에게 북한을 왜 두려워하지 않냐 하고, 87년 세대는 후배들에게 독재정권의 후신에게 왜 지지를 보내냐 한다. 각자가 살아온 날에서 기억과 망각은 개인의 몫이다. 누군가는 독재로 기억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산업 발전의 황금기로 기억 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망각으로 잊혀진 세월이다. 지나간 과거를 잊으면 안되겠지만 서로의 선택적 기억과 망각을 관용으로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 사람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 세대가 이끌어 온 시대를 존중하며 선의의 경쟁으로 발전하는 사회가 되어야
파지줍는 노인과 비정규직 또는 실업의 젊은이가 공존하는 시대가 되었다. 노동 시장에서 정년 연장의 젊은 노인네들과 신규 취업 시장에 진입해야하는 젊은이들이 함께 경쟁하는 노동시장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대기업의 노동조합을 귀족 노조라 하며 세대간 또는 비취업 인구와의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 많은데 예를 들어 현대중공업 노조는 생산직이 6천만원의 연봉을 받는데도 파업을 일삼는다며 귀족노조로 몰아붙여 민중과의 괴리와 갈등을 언론에서 조장하는 일이 대표적이다. 20년 넘게 일한 블루칼라 숙련공이 연봉 6천을 넘게 받아야 정상적인 사회가 아닌가? 취업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기이니 언론은 연봉 6천만 강조하며 날을 세우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87년 민주화의 바람을 안고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노동조건을 혁신적으로 개선시킨 주역이다. 자 이쯤에서 곰곰이 생각해보자. 대기업의 노조와 공무원의 노동조건과 임금이 지속적으로 개선되어야 사회 전반적으로 노동 조건이 개선이 되는 것을 아는가? 주 5일제 하면 나라 다 망할 것처럼 했지만 대기업과 공공에서 먼저 도입하면서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미쳤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대기업 노조가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알기 때문에 자꾸 성장하지 못하도록 옭죄고 그 방법이 귀족노조와 일반 대중으로 갈라치기하는 전술을 쓰고 있다. 결국 민중과 민중이 서로 반목하여 경쟁하게 만들고 그 위에서 군림하려는 기득 세력에 놀아나고 있는 꼴이다. 민중들끼리 경쟁해서는 안된다. 각 세대와 각 영역에서 전반적으로 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응원까지는 못해줄 망정 선의의 경쟁으로 전체 사회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분야에 노조가 결성된 일도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해고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공공 분야에서 노동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줘야 전체 노동시장의 발전이 있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은 역사적 잣대로 봐도 맞지 않는 이념의 올가미
여전히 우리 사회은 진보와 보수, 좌익과 우익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역사적 연유를 살펴보면 우리 실정에 그닥 맞지 않는다고 본다. 해방 공간에서 임시정부를 필두로 하는 김구, 장준하 선생 같은 민족주의 운동가들은 대체로 우익이라 할 수 있다. 우익 민족주의자 였고 여운형, 박헌영과 같은 좌익 민족주의자들도 있으매 우리나라에서 좌익 사회주의자라 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었을까? 해방 공간에서 인민위원회를 세우고 건국 준비를 하기 위해 준비했지만 여기서 인민위원회는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다. 당시에 인민이란 용어는 민중이나 국민 정도로 이해하면 되는 단어인데 한국전쟁을 거치며 북한이 자주 쓰는 인민이란 용어는 금기시 된 용어가 되버렸다. 친일 청산을 끝내지 못한 가운데 이들은 재빠르게 친미파가 되어 민족주의 우익을 자처했고 진짜 민족주의 우익(김구, 장준하 등)은 좌익에서도 자리잡지 못하고 친일의 과거를 지닌 친미주의자들의 우익 자리에도 들어가지 못한 어설픈 포지션이 되었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친일/친미 세력이 확고하게 반공을 기치로 우익의 자리를 점하였다. 이후의 상황은 뭐 한국전쟁의 트라우마로 진보 좌익 인사들이 대거 간첩으로 몰리며 죽어나간 상황을 보고 있자면 이 땅에 지금 진보/보수, 좌익, 우익이 어디 다들 제대로 자리나 잡고 있는걸까 싶다. 우리 환경에서는 이미 좌/우 진영 논리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념을 기저에 두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시대는 지났다. 이 보다는 실리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더 건강하게 지탱하기 위해서는 공정과 정의가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군사독재 치하에서 공정과 정의 보다는 헌법위의 편법이 강고하게 지켜져 온 사회였기에 공정과 정의가 앞으로 우리 사회의 이념이 되어야 한다. 어려운 개념도 아닐 뿐더러 자본주의를 더 건강하게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복지 제도로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면 더 없이 좋은 대한민국이 되지 않을까?
핵심은 어떤 이념을 가졌든 한 개인이 건강하고, 교양있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념의 트라우마, 군사독재를 겪어오며 나서면 디진다는 트라우마 그러다보니 건강한 이념을 바탕으로 사회가 발전하기 보다는 강력한 정치체제 아래서 순응하며 발전해온 사회에서 건강한 의식을 가진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양성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태극기를 흔드는 노인들이 적법한 절차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들을 간첩이라 하지 않는가? 앞으로 우리 사회는 서로의 처지를 잘 이해하는 관용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고 민중들끼리 경쟁하는 우매한 자본의 짐승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며 공정과 정의를 제대로 세우기 위한 교양과 상식을 겸비해야 한다. 그들만의 리그인 검찰, 언론, 법꾸라지들이 더 이상 해괴망측한 논리로 국민을 갈라치기하여 우매하게 만들지 못하도록 깨어있는 시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영국의 노동당 당수였던 '토니밴'은 기득권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건강한 시민이라 했다. 건강한 시민은 교육을 잘 받고 신체적으로 건강하며 그런 시민들은 자신감이 있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부지런해진다는 것이다. 기득권은 우매한 민중을 가장 선호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적당한 겁을 주어서 (주로 경제정책으로) 순응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더 이상 속지 말자, 그리고 민중이 민중을 이해하고 보듬으며 관용과 상식 교양을 두루 갖추고 건강한 시민으로 살아가자!! 다음 대선은 건강한 시민들이 건강한 대통령을 뽑아 건강하고 자신감 있는 시민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한다. 관용이 우선이다. 관용도 교양과 상식이 겸비되어야 할 수 있으니까
길안면행정복지센터 김신기철